어제는 데이터를 다루는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비도 오고 그래서 축축할 때에는 역시 파전에 막걸리만한 게 없으니까.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 장대비같은 굵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지만, 아무도 없는 북카페에 앉아서 글을 쓴다. 마침 어제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 중에 '평균'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기록한다.
친구는 대중공감성이라는 키워드를 던졌다. 대중의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신경써야하는 일이다. 나도 백번 맞다고 박수쳐줬을 것이다. 그게 디자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꺼내든 무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A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B에게 말했다. '네가 하는 디자인에 대중이 공감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봐야한다'고. 톤은 디자인 '교육'을 받은 너와 달리, 나는 대중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듣고있자니 술기운에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걸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있기는 한가?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니 A가 꺼낸 '대중공감성'이란 '엘리트주의'에 반하는 개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엘리트들만이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대한 적대감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꺼내든 디자인이 엘리트주의인지, 대중주의인지 판단할 수 있는 대중이란 게 있을리가 없다. 대중도 결국 특정한 모집단에 불과하니까. 개인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 그건 개인의 의견이니까.
대중공감성이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결국 A는 위와같은 정규분포를 상상한 것이라고 말하고싶다. 대중이란 저 중앙에 위치한 집단을 이야기하므로, 그 중앙을 타게팅할수록 더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규모가 넓은 중앙값', 그러니까 '평균이 가져다주는 안전성'에 대한 신봉인 셈이다.
숫자로 말하는 평균
책은 평균에 대해 지독하게 부정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현상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고(돈이나 생산량, 인구 수 등), 그 숫자를 제대로 해석할 능력만 있다면 평균만큼 강력한 주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평균적'으로 이 시기에 이런 마케팅을 하면 효과가 좋았으니 이렇게 하자. '평균적'으로 이 때 수확량이 늘어나니까, 더 많이 묘목을 심자. 모두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지표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A가 했던 말도 납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평균대로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건가?
언더독과 밴드웨건
하지만 세상사 참 이상하다. 평균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을 조종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가봐도 명확하게 약자인 쪽의 편이 되어주고싶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이미 잘나가는 쪽에 빌붙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이런 현상들을 언더독-밴드웨건이라고 부른다. 약자인 편을 응원하는 심리를 언더독, 그리고 강자인 편에 끌리는 심리를 밴드웨건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A의 말대로라면 이런 심리를 자극하는 사람들은 평균이 아니라 오히려 양 쪽의 끝에 위치한다. 언더독과 밴드웨건이 정말 강력하게 대중을 움직이는 현상이라면, 인간의 행동에 한해서 평균은 중앙으로 모이는 성향이 아니라 양극에 의해 흔들려 흩어지는 성향의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즉, 중앙에 몰린 평균은 단단하게 쌓아올려지는 돌탑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 양 옆으로 끊임없이 헤쳐지는 불안정한 모래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평균을 왜 이렇게 혐오하는지, 평균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옳은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인간 행동에 대해서 평균이 의미없는 허상이라는 말은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해보자.
가슴이 답답하다. 인간이 나아갈 길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평균이라는 건 눈 앞에 놓인 열매와 같다. 조금만 힘써 손을 뻗을 수만 있다면 그 빨갛게 익은 달디 단 결과물이 입안에 쏙 들어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데이터가 증명해주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열매가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다. 수능을 잘 보면 대학을 잘 갈 것이고, 공무원 시험을 잘 보면 공무원이 될 것이고, 또 여러 스펙이 좋으면 대기업에 갈 것이다. 합격증과 사원증, 높은 연봉은 눈에 보이는 황홀한 지표이고, 그것이 '평균'이 제시하는 길의 끝에 놓여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을 따르는 것은 꽤나 마음아픈 일이다. 주변 친구들이 리트 시험에 도전하고 노량진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입안이 텁텁해진다. 그 길이 틀린 건 아니지만, 마냥 시원하게 보내주기도 씁슬한 것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막연하게 생각한다. '나는 저런 길로 가지는 않을 거야'.
반대로 학교가 제공하는 커리큘럼에 정말 잘 맞아떨어지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수행해서 교수님들의 사랑을 받아 내로라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에 취직하게 되는 경우를 보고 있자면 안 부러운 건 또 아니다. 다만 나에겐 그런 정도를 걸어갈 능력이 없다는 것만 알고 또 씁슬해 할 뿐. 저런 '정'도는 걷고싶지 않고, 그렇다고 이런 '왕'도는 걸어갈 능력이 없으니 나에게 남은 건 평균을 무시하고 나만의 길을 뚫는 것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평균을 따르지 않고 특별한 개인이 되자니..? 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평균을 따르는 것보다 수백 수천배는 어려운 일이다. 잠도 몇날 며칠 포기해야하고, 성취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 동네방네 돌아다녀야 한다. 정도를 걷는 것 보다 몇 배의 노력을 싣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게, 훤한 길 따라가면 되지 뭣하러 고생을 사서 해'.
정도도 왕도도, 게다가 나만의 길도 이렇게 걷기가 힘들면 대체 어떡하라는 말인가! 차라리 평균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참 무책임한 책이네.
2학년의 나는 주변의 기대가 무서웠다. 내 친구들의 평균은 너무 높았다. 발끝을 세워도 닿지 않을 것 같은 높은 평균이었다. 이렇게 내 주변에는 잘난 사람이 너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해내고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 것 같아 점점 궁지로 몰려갔다. 괜히 나도 그들과 같은 것들을 해내야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했다.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는 나는 끙끙대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저는 친구들처럼 스튜디오에 들어가거나 디자인 공부를 해서 뭘 성취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친구들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제가 커서 다른 사람처럼 위대한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
그러자 교수님은 선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 위대한 길이 준비되어있는 게 아니라 일단 앞으로 걸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온 길들이 위대한 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단다. "
" 그리고 그걸 알아채는 순간 더 많은 길이 보이지. "
정도, 왕도, 평균, 그런 것들은 내 걸음을 옮기는 중에 신경써야하는 것들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가는 것'이다. 옆을 바라보느라 내 걸음을 멈추고, 잡히지도 않는 위를 바라보느라 걸음을 늦출 필요는 없다. 그저 내 뒤에 과거의 나를 계속해서 돌아보며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왔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만의 길'이라는 말 자체는 결국 독립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 가는 길을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내 길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던지고 나아가는 걸음걸음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나만의 길은 미래에 있는 허상이 아니라 지나온 과거의 기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완벽하지 않아야 완벽할 수 있다 (0) | 2020.09.29 |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