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회사 인수된단다. "
내 대답은 그저 와우, 그리고 한참은 말이 없었다. 대표님에게 커피숍에서 들은 이 문장에 나는 벙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손끝이 떨리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머릿속에서 어떤 카드를 펼치고 숨겨야하는지 수없이 계산한다.
얘기가 나오기 전부터 나는 잠시 회사 업무를 뒤로 미뤄둔 채 졸업 준비를 하느라 기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실제로 회사에도 곧 그만두겠노라고 퇴사에 대한 언질을 해놓았었다. 같은 분야에서, 같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3년동안 일을 한다는 게 이제 지겹기도 했고, 무엇보다 초기 스타트업이라는 회사에서 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한계를 서서히 느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니어들끼리 아둥바둥 모여서는 실수만 연신 해대며 배워나갔던 이 회사가 인수가된다니. 잘 됐네.
특히 돈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 정들었던 팀원들끼리의 마무리가 씁쓸하고 비참해질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고생했던 팀원들과 훈훈하게 와인잔 기울이며 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 근데 그 회사에서 너도 오면 좋겠대. "
펑, 생각해보지 못했다. 회사가 인수된다는 건 결국 나를 포함한 이야기였구나. 그리고는 온갖 계산이 시작되었다. 내 지분은 물론이며 인수되는 회사에서 연봉을 얼마를 쳐줄 것이며, 스톡은 얼마를 나눠줄 것이며, 몇 년 동안 일하는 걸로 계약할 것이며... 주니어 창업에서 이런 것을 생각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급하게 마음 속 저울을 꺼냈다. 아니, 나는 그...
" 최대한 빨리 결정하면 좋겠어. "
3연타에 머리속이 결국 꽝, 터져버린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나리오가 수많은 숫자들과 함께 다가왔고, 나에게는 내 미래를 담고 있는 저울 하나가 돌연 손에 쥐어졌다. 문제는 내가 직접 달 수 있는 무게추가 없었다는 것.
나는 한 번도 취업을 준비해본 적이 없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이기도 했고, 창업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있었기에 창업은 두 번 정도 진행했고, 여러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지만 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 흔한 자기소개서도 써본 적 없고, 면접 준비나 영어 스펙 준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상태를 '검증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든 명패를 내려놓고 시장에 내던져졌을 때 어느 정도의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지 아예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취업시장에 대해,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의 구성원으로써 디자인을 한다는 것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다. 나름의 리더로써 팀을 만들고, 문화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굴려나가는 등 큰 그림 자체에는 어느정도 일견식이 있었지만, 정작 '진짜 실무자'로써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이 회사에서는 내가 리더였고, 곧 실무자였으니까. 내 명령에 내가 따를 뿐.
즉 나, 실은 사회초년생에 발도 들이지 못한 아직 학부생이라는 말이야.
그런 와중에 저울 건너 편에 아주 무거운 추가 얹어졌다. 자, 여기 저울 양 쪽 중 하나를 골라야 해, 한 쪽은 지금 얹어줄거고, 한 쪽은 나중에 얹어줄 거야. 나중에 얹어지는 추의 무게는 미리 알려주지 않을 거야. 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겠지. 어떡할래?
이 저울이 생기기 전까지 나는 환상이라고 해도 좋을 취업전선에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두 번의 창업을 경험했고, 프로젝트도 열심히 진행했다. 하지만 막 땅을 박차고 오르는 초기 스타트업을 두 번이나 경험하다보니 대형 스타트업이라는 환경에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브런치나 여러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스타트업 인재들의 반짝거림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간이란 간사하게도, 눈 앞에 달콤한 것이 보이면 가지고 있던 욕심을 점점 줄여나간다. 이 정도면 괜찮잖아, 오기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갔을 거야.
일주일 동안 나는 이 중대한 결정을 위해 밤잠 설쳐가며 사람을 만났고, 미팅을 했고,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다. 방향성은 제각각이었지만 각자의 생각을 들으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아직 놓이지 않은 추, 그러니까 취업 준비를 선택했다.
같은 타겟과 같은 톤앤 매너, 같은 비전을 가진 회사로의 이동은 역량을 특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많은 분야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분야가 주는 디자인의 특정성과 한계가 있다는 것도 크게 느꼈다. 4~50대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에서 갑작스레 통통 튀고 젊은 디자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같은 분야의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 이직했다가는 또 같은 느낌의, 같은 방식의 디자인을 비슷한 소비자에게 보여줄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나의 무기이자, 나의 족쇄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취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떨어지고 붙는 걸 떠나서, 새로운 커뮤니티에 나만의 포트폴리와 이력서를 정리해 제출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다시 무너지고 도전하는 일련의 과정이 내 나이에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사실 취업 준비하면서 이 부분은 조금씩 후회중, 아~ 취업 준비 정말 어렵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2년차가 거의 되었을 때 이례적으로 내 능력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1년차까지는 내가 스스로 배우며 검증해나가는 과정이 확실한 발전으로 느껴졌다. 아침에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의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팀원들과 그것을 공유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스스로의 배움에 대해 한계를 느꼈다. 이를테면 내가 가진 세계의 끝까지는 이미 가본 것이다. 그 껍질을 깨기 위해서, 나는 더 넓은 세상의 조언과 질타가 필요했다.
위와 같은 세가지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민했던 것은 주어지는 돈과 연봉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돈이면 가족에게도 뭔가 하나씩 해줄 수 있고, 내 미래를 위한 목돈이 될 수도 있고. 금전적인 이유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미래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내 일을 사랑하고, 팀을 사랑하고, 가치를 사랑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나는 '어쩌다보니 인수되어, 돈 많이 준다길래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내 모습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이 조금 슬펐다.
결국 나는 내 저울에 내 추를 얹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남이 갑자기 얹은 추로 내 인생의 선택을 휘둘린다는 것이 무서웠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고.
결국 나는 곧 취준생이 된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시기, 나도 똑같이 고생하고 고민하고 성취하는 취준생이 되는 것이다. 나를 점검하고, 정제하고, 문서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정말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 사는 방법인 것을. 가끔 이런 선택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정말 아쉬운 선택을 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 금액과 기회를 생각하면 조금은 씁쓸하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날 내 인생을 뒤돌아볼 때, 그 결정을 멋있는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취업준비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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