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시간으로 계약을 하잖아요,
계약서대로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하는 건데
야근은 당연히 시키면 안 되죠.
회사를 다니다보면 수많은 프로세스가 우리를 감싸고있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명시되어있는 '규칙'에 의해서 내가 작성한 서류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도장이 찍히고 나서야 다시 내 손에 쥐어지고,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프로세스, 프로세스. 그 프로세스로 인해서 내 실적은 평가받고, 정해진 규칙에 따른 연봉협상이 이어지고. 듣자하니 공식적으로 명시되어있는 '규칙'이 우리의 일을 규정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에서 일하는 과정이 전부 '규칙'으로 치환될 수 있느냐하면 머릿속에 흐릿하게 물음표가 떠오르는데요.
그렇다면 어제 같은 셀 기획자 서진님, 마케터 영민님이랑 맛있기로 소문난 포차에 가서 찐하게 소주잔 부딪히며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눴던 경험은 어떤가요? 점심시간 끝나고 팀장님이랑 커피숍에가서 요즘 있었던 업무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자리를 가졌던 건요? 이런 것들은 그 어떤 서류에도 적혀있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회사의 일과 떼어낼 수도 없는데요.
기업은 하나의 커다란 기계와 같습니다. 정해진 전략에 따라 구조를 변경하고, 실행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각각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 일정한 속도로 꾸준하게 돌아가는 거죠. 이런 정밀한 기계를 잘 굴려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엄밀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성과가 좋은 사람에게 더 큰 동기를 부여하는 '인센티브 구조', 부서와 부서간의 협업을 원활하게 하는 '부서간 연결 구조', 또는 팀이 직접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 그리고 다시 회고하는 자생적인 '스크럼 구조' 등이 기업이 규정하는 공식 조직입니다.
공식조직은 명시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취직 직전에 작성하는 근로계약서나, 회사에 처음 들어가면 받게 되는 회사 구조도같은 것이죠.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이 곳에 연락하고, 어떤 일은 이 곳이 처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명시된', '계약상'의, '문서'에 의한 '규칙'들이 모두 공식 조직을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MZ가 신봉하는 '계약서대로'의 근간입니다. '기업'은 계약의 연속입니다. 기업은 문서와 계약을 통한 구조를 애초에 제대로 만들어놓고, 노동자는 그 규칙들을 잘 따르는 것이 곧 기업과 노동자의 합리적인 관계입니다. 애초에 잘 설정해놨으면 문서 만들어 올리고, 도장 찍혀 내려오는 일을 잘 해내기만 하면 기업의 기능은 잘 돌아갈 거란 말이예요. 즉, 지금 나에게 야근을 시켜야하는 것은 기업이 구성하고자 했던 공식조직에 허점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말은 즉 내가 아니라 사장님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의 실패를 내가 감안해야하냐구요!
하지만 사장님 의견도 이해는 갑니다, 어디 기계가 스스로 굴러가나요? 누군가는 열심히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공급해야하고, 기름칠을 해야하고, 정비하고 끊임없이 관리해야 기계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겠죠. 비공식 조직은 이렇게 커다란 기계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전기, 윤활유와 같습니다.
조직에는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계가 아니라 '개인'입니다. 하루만 해도 수천, 수만가지의 생각과, 수백만가지의 단어와, 수천만자의 텍스트들이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연결하게 되겠죠. 생각과 단어, 문장, 텍스트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왜곡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결함을 가진 정보전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들을 공식 조직에만 맡기기에는, 그들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개인'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간극을 하나하나 통제하기 위해 공식조직을 세부적으로 설정해 나가는 일은 비효율적입니다. '앞으로 텍스트를 10글자 이내로 작성하세요'라든가, '이러이러한 단어는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규칙을 하나하나 전부 정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개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만드는 것은 '공식 조직'이 아닌 '비공식 조직'의 전문분야입니다.
세부적인 통제는 비공식 조직을 통했을 때 훨씬 효율적입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는 알음알음 이렇게 해왔어'에 해당하는 부분이죠. 명시된 정보는 아니지만, 모든 공식 조직은 이런 암묵적인 규칙에 따르는 비공식 조직을 알게 모르게 품고 있습니다. 출근 시간에 5분 일찍 와서 매장 정리를 한다던가 하는 귀찮은 규칙도, 계약서에는 일언반구하지 않지만 생일날 사장님이 주시는 작은 생일 선물 같은 것들도 '비공식 조직'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식조직을 통해서는 도통 생기지 않던 끈끈한 '개인과 개인간의 정'이, 비공식조직을 통해서 훨씬 손쉽게 구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선배님들은 이런 비공식 조직의 힘을 빌리는 게 편하고 빠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너무 규칙대로 빡빡하게 살면 재미 없잖아요, 가끔은 같이 날밤 새며 일도 하는 거고, 가끔은 쉬엄쉬엄 한시간 몰래 퇴근하기도 하고, 그게 재미 아니겠어요. 쉿, 일찍 퇴근한 건 우리끼리만의 비밀이에요.
'부장님, 저흰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해서요...'
'설명하지 말고, 서류 다 주고 받은 건데 뭐 그리 말이 많아'
유도리 있게 알음알음 일하는 비공식 조직과, 프로세스대로 딱딱 깔끔하게 일하고 싶어하는 공식조직. 둘은 당연하게도 가끔 대립하게 되기도 합니다. 비공식 조직이 너무 강력해지면 우리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사내정치'의 초석이 되기도 하고요. 공식조직이 너무 강력해지면 살벌한 분위기에, 건전한 사내 문화 구성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죠.
이 개념을 알게 되어 좋았던 점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정확한 이론'으로 알게 되었을 때 조금은 이해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마냥 계약서대로 하려고 하는 철없는 MZ 세대의 생각을 '더 나은 규칙과 방침을 통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줄 능력이 있는 공식 조직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계약서 이외의 일들을 '부득이하게' 시키게 되고, 귀찮게 저녁 먹자고 이야기하는 선임들의 생각을 단순히 꼰대질로 치부하지 않고 '조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비공식 조직을 구성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도 야근은 쪼끔 힘들지만요)
*IT 업계의 프로덕트 디자인과, 조직 이론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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