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진행한 회고를 기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지옥같은 출시일정이 일단락 되었다! 기획도, 일정도, 인력도 뭐 하나 안정적일 게 없었던 우당탕탕 개발이 어느정도 끝을 보이고, 자잘하거나 심각한 오류들이 지금도 판을 치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출시'는 해냈다. 이 말도 안되는 프로세스에 갇혀있었던 3~4개월 가량의 시즌을 나는 지옥의 구렁텅이라고 부른다. 진짜,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 지 모르는 그런 구렁텅이였다.
사람이 급해지면 프로세스를 쉽게 버리게 된다. 흔히 '에잇, 지금 바빠죽겠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라는 대사가 어울리는 상황이 온다. 잘 굴려왔던 스프린트는 이 지옥의 구렁텅이 시즌동안 완벽하게 정지. 플래닝과 회고는 무슨, 간신히 아침 미팅 정도만 안부인사 개념으로 진행했다. 개발팀의 프로세스가 이런 형국이니 팀 전체의 회고와 스케줄링도 멀쩡했을리가 없다. 차일피일 밀리는 출시일정에 수많은 팀원들이 휘둘렸고 팀의 사기가 아주아주 조금씩 떨어져서 거의 바닥을 쳤던 순간도 있었다. 서투른 일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이 프로세스와 팀의 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동하기 시작한 앱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이제는 다시 우리의 프로세스를 봉합할 때가 되었다.
나의 지론=사람은 예민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던가, 말 한마디, 이미지 한 마디에 생각하는 게 홱홱 바뀐다. 바꿔 말하면 결론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달할 말과 이미지를 아주 잘 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냥 툭 던지는 말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4개월 간의 구렁텅이를 지나왔으니 각자 생각의 골이 아주 깊어졌을테고, 이뤄낸 것도, 잃어버린 것도 많았을 것 같았다. 현재를 봉합하고 깔끔한 미래를 그려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를 잘 마무리 해야했다. 가장 필요한 건 지금까지에 대한 '회고'라고 생각했고, 그날로 회고에 대한 자료를 마구마구 찾아봤다. 이 글을 통해 우리 팀이 진행했던 회고 방법에 대해서 공유한다.
🔥 회고의 날 세션 PPT 템플릿 다운받기 (figma)
자유롭게 수정하여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
이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우연히 더 많은 팀원들과 함께할 기회들이 있었다. 근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에잇, 지금 바빠죽겠는데....(중략)'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이렇다할 회식이나 소개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게다가 우리팀은 재택근무가 위주인, 혹은 아예 재택근무만 하는 팀원도 있어서 입사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초면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세션을 진행하기 위해 자기소개를 해야했는데...
어디서 뭘 하는 누구구요, 닉네임은 뭐구요, 잘 부탁드립니다~하는 자기소개시간이 될 게 뻔했다. 회고의 시작을 끊는 자기소개가 지루하다면 그 뒤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소개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손을 움직여서 뭔가를 할 때 더 솔직해지고 순수해진다. 어릴 때가 생각나서 그런 걸까? a4용지 한 장에 '내가 지금 회사에서 겪고있는 상황'을 간단하게 그리도록 했다. 그림으로 자기소개를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1)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하다보면 말할 때보다 더 자세한 상황들이 생각나고, (2)또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그림으로 충분히 유쾌하게 소화할 수 있다. (3)마지막으로, 다 같이 그림그리는 경험 자체가 즐겁다.
또 그림을 보면서 설명할 때,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잘 했다'하는 부분을 꼭 말하도록 했다. 우리는 고생길을 4개월치나 걸었던 팀인만큼, 여기서 얻은 게 각자 하나씩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가 맨땅에 시간을 던지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또, 스타트업의 백미는 개개인의 성장이 아니겠어.
1. 인원수 만큼의 종이와 필기구를 준비한다.
2. 5분동안 본인이 회사에서 겪고 있는 상황을 그리도록 한다
(아침마다 커피를 들고오는 나, 개발팀과 기획팀 사이에서 소통하는 나, 팔이 열 개 달린 나...)
3. 각자 그림을 들고 본인의 주요 역할과 이번 프로젝트에서 본인이 잘 해냈다,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다음은 KPT 세션. 여러 칼럼들을 찾아보다보니 KPT라는 키워드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KPT란 keep, problem, try의 초성으로 만들어진 회고 방법론이다. 유지해야할 것,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시도해야하는 것들을 차례대로 말하면서 팀 내 상황을 정리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KEEP(유지), PROBLEM(문제), TRY(시도)라는 이름을 보고 기분 나빴던 건 나 뿐이었을까? 긍정적인 단어들보다는 적당히 유지하는 keep, 부정적인 problem,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해보자는 힘빠진 try의 구성으로 만들어진 이 조합에 나는 조금 의심이 갔다. 저 단어들을 듣고 사람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름의 긍정적인 단어로 재구성한, SCS세션. STOP 지금 당장 멈춰야하는 것, CONTINUE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야하는 것, Start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멈춰야할 것'과 '유지해야할 것'들을 각자 자유롭게 포스트잇으로 작성한다. 10분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작성할 시간을 여유롭게 제공한다. 단, 이 때 '특정한 START로 이어지도록 작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저녁 메뉴로 곱창은 그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괜찮지만 '저녁 메뉴로 스파게티도 먹었으면 좋겠다'는 안 된다.
모두 작성했다면 포스트잇을 모두 칠판에 붙인다. 모두 칠판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면 각자 조용히 칠판을 둘러보면서 동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티커로 투표한다.
이제 멈출 것과 지속할 것을 두고 논의를 시작한다. 포스트잇을 무작위로 지정하고, 포스트잇을 작성한 사람은 거수하고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풀어서 설명한다. (*이때 익명으로 할지 실명으로 할지 정말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인 만큼 실명으로 용기있게, 다만 가감없이 말하는 훈련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실명제로 진행했다.)
중요한 점은 이 때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정하려고 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발표자의 의견에 대해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또 이 자리에서 해명하려고 하지 않아야한다. 이 세션의 목적은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진솔하게 공유하면서 반성하는 것에 있다. 단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이 사실과 틀리거나 더 나은 논의를 위해 첨언이 필요한 경우 가감없이 수정하고 첨삭해도 좋다.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하는 논의하기가 끝나면 이제 마지막 S로 넘어갈 차례다. 우리는 앞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통해 현재까지의 상황을 전부 동기화했다. 이제는 그런 문제제기들을 개인이 불만으로 담아 삭히면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회사의 규칙과 문화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5분 정도 각자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면서, (1)멈췄으면 하는 것들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2)계속했으면 하는 것들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계속할지, (3)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을 시작하고 싶은지 포스트잇에 작성한다.
이후로는 포스트잇을 똑같이 칠판에 붙이고 공감되는 포스트잇에는 전과 같이 스티커를 붙인다. 가장 많은 스티커가 붙은 포스트잇부터 하나씩 지목하면서 다같이 논의해 정확한 액션플랜을 도출한다.
저녁메뉴로 곱창을 그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의견과 곱창을 좋아한다는 팀의 의견이 있다면 둘 모두 받아들여 매 월 첫째 셋째 수요일을 곱창데이로 정한다든가, 팀들의 진행상황을 정확히 공유받을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 공동의 회의기록 라이브러리를 만들다던가하는 식이다. 이런 룰이 잘 정해지고 유지될 수 있도록 체크할 담당자까지 정한다면 회고가 끝난다.
1. 각자 포스트잇에 STOP, CONTINUE를 자유롭게 작성해 칠판에 붙인다.
2. 돌아다니면서 포스트잇을 읽어보고, 동의하는 포스트잇에는 스티커로 투표한다.
3. 스티커가 많이 붙은 순서대로 STOP, CONTINUE에 대해 논의한다.
4. 논의한 상황을 바탕으로 START 세션을 시작한다.
(1)멈췄으면 하는 것들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2)계속했으면 하는 것들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계속할지,
(3)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을 시작하고 싶은지
포스트잇에 작성해 칠판에 붙인다.
5. 마찬가지로 돌아다니면서 포스트잇을 읽어보고, 스티커로 투표한다.
6. 스티커가 많이 붙은 순서대로 START에 대해 논의하고, 팀원들의 동의를 받아 액션플랜과 담당자를 지정한다.
사실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 바로 회고의 회고인 거임.
회고를 한 번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면 이번 회고에 대해서 팀원들의 피드백과 평가가 중요하다. 아까 자기소개를 했을 때 사용했던 종이의 뒷면을 반으로 나눠서, 왼쪽에는 회고에서 좋았던 점, 오른 쪽에는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쓴다.
모두 기록했다면 여건에 따라 롤링페이퍼 하듯이 종이를 돌려가며 서로에게 코멘트를 달아주는 것도 좋다. 이왕 모인 김에.
마무리하며
프로세스라는 건 참 중요하다. 팀원과 팀원을 생각과 감정을 넘어서 실질적인 행동으로 묶어내는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박하게 움직이는 스타트업에서 프로세스를 항상 온전하게 지켜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이렇게 느슨해진 시스템의 나사를 조이고 벌어진 감정적인 틈새를 엮어내는 방법 중 하나로 회고를 활용하면 좋다. 객관적으로 현재 상황을 공유하고 논의하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과거의 일들을 묶어 서랍에 넣어두곤 미래의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시간을 들여 회고하는 게 어렵다면 회고를 도와주는 툴도 있으니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다.
> 가볍게 KPT 세션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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